花香의 生
볕이 들지 않았다. 잠든 듯 내려앉은 눈꺼풀은 움직임이 없는데도, 깜빡대며 점멸하는 빛이 있었다. 그것이 제 생명의 증거와도 같은 것임은 뒤이어 깨달을 수 있었다. 얇은 피부 아래로 빛이 인식되었다가, 말았다가, 다시 밝아졌다가 암흑에 잠겼다가……. 그래서 볕이 들지 않았다. 이곳에는 볕이 없다. 죽어감의 증거 따위가 아니라 내일을 속살대는 빛이 존재하지를 않았다. 한 번쯤은 너와 그런 볕 아래를 걷고 싶다는 마음을 어렴풋이 품었던 것도 같았으나, 흐린 의식 속에서 온전한 기억의 결정체를 찾아내기는 어려웠다.
희미한 기억 속 나의 생은 마치 한 포기 풀과도 같아, 일평생 볕 아래서 태만한 숨만을 잇는 날의 연속이었다. 그렇게 하루는 바람을 호흡하다가 하루는 눈물과도 같은 빗방울을 똑, 똑 흘려내다가 어느 사이엔지 꽃을 피워내는 것이다. 짧은 개화 시기를 지나면 고개를 떨구고 바스러지듯 말라죽겠지. 쓸모없던 한숨은 다만 이제는 진정 풀의 것이 되어 네 곁을 돌 화향이 되리라. 그리 생각하니 어쩐지 우스워 상황에 맞지 않는 웃음을 터뜨릴 뻔 했다. 그래도 나쁘지만은 않잖은가, 내 생에 행복이라는 어여쁜 꽃을 피워줄 수 있도록 해준 사람이 바로 너이거늘…….
“……릭.”
테오필, 릭, 카데르. 붙어버린 입술을 억지로 떼어내고 굳은 혓바닥을 찢어낼 마냥 움직인다. 반 망자 주제에 난폭한 욕심이었다. 너라는 이를 가리키는 모든 단어를 마지막으로나마 읊조리고 싶었다. 빛나는 찰나를 사랑했담 그 순간 순간이 이어질 테니 이는 곧 영원이라. 나는 영원 속에서 너를 사랑했다. 내가 모르는 과거와, 현재와, 앞으로는 알 수 없을 너의 미래마저 이 작은 몸뚱아리에 우겨넣고 꾸역꾸역 사랑하고야 만다. 묏자리에서 금화를 끌어안는 대부호의 탐욕, 벽의 균열에다 수없이 입맞추는 새벽의 파라모스. 측정할래야 측정할 수 없으리만치 넘치는 이 감정을 어느 무엇에 비교할 수 있으랴. 뻣뻣한 손가락을 애써 움직여 네 눈가를 쓸었다. 마취약이 혈관을 타고 흐르는 꼴처럼 무감한 촉각이었으나 굳어가는 머리로도 알 수 있었다. 분명 산 자의 온기가 맞닿아 있을 것이다. 생자의 부탁, 슬픔, 심장이 뛰고 피가 흘러 전부를 온전히 느낄 수 있는, 스러지는 나와는 다른. 가파른 숨을 뱉었다. 산소가 돌지 않아 정신이 몽롱했다.
“사랑해.”
사랑하고 있어. 앞으로도 그럴 테고 변치 않을 거야. 무의미한 수식언들은 하데스의 문 앞에서 맥없이 흩어졌다. 결국 돌고 돌아 남는 것은 가장 단순명료한 것이어서, 만물의 진리와도 같은 단어만을 짤막히 뱉는다. 너는 내 사랑을 알고 있어 그것의 영원도 불변도 의심이 존재하지 않음을 말이야 그렇지? 나를 가장 잘 아는 이는 단언컨대 너라고 할 수 있는걸, 전부를 내어준 게 너 뿐이었으니. 얼핏 손 위에 네 것이 얹히는 성 싶기도 해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그것이 이미 죽은 낯 위에 표정으로 나타났는지는 모르겠다. 기도를 막고 자라나는 꽃나무의 감각이 선연하여, 바람 빠지는 듯한 음성 사이 사이로 꽃향기가 비쳐들었다.
“나는, 네가…….”
거의 들리지도 않는 소리를 긁어내며 직감했다. 아, 이제 끝이로구나. 나는 끝내 이 이상의 말을 사랑스런 너에게 전할 수 없겠구나. 삶에 미련이 있던가? 글쎄 그것보다는 너에게 미련이 있다. 마지막임에 너무 서글퍼하지 않는다면 좋으련만. 무어라 위로를 하면 좋을까, 나는 너를 떠나지 않을 터인데. 내 생의 꽃을 네가 틔우게 해주었으니 나는 너를 위한 꽃이 되어 영영 네 곁을 맴돌 것인데. 에드윈 윈체스터는 이곳에 죽으나 죽음에 머무르지 않는다. 싸늘하게 식은 시체 따위는 존재할 일 없다. 다만 나는 네가 숨쉬는 바람이 되고, 네가 우는 날 함께 낙하하는 빗방울이 되고, 너를 둘러싼 풀이 되어 너의 남은 시간을 함께할 테니. 그러니 너무 슬퍼하지 말기를 바란다. 넘치도록 눌러 담은 사랑마저 과분함에도, 떠나는 이로서의 마지막 갈망이 있다면. 차마 전하지 못한 마지막이지만…. 아니, 분명 전해졌으리라. 내 전부를 알고 있는 유일이 너니까. 못다 한 문장의 뒷부분 정도는 알 수 있을 테지. 그리 생각하니 적적한 기분이 조금은 달래어지는 듯 했다. 마지막이 될 숨의 너머에서 흐릿한 의식을 곱씹는다.
―나는 네가, 살았으면 좋겠어.
덧없는 소원이 흩어진다. 무성한 녹음의 안에는 남은 생명이 없었다. 몹시도 깨끗하게 지워진 인간의 흔적은 그러나 무형의 기억으로만 기록되어 있을 테니. 생의 증명은 남지를 않고, 그저 이 땅 위에 싱그러운 향기로만 오래 머물 것이다. 오래, 아주 오래……. 아마도, 함께 있고 싶었던 자의 곁에서.
밤은(@for__Statice)님 지원